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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 간 분쟁이 런던 국제중재법원으로 간 이유는?

돌담쟁이 2025. 5. 2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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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우리나라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바라카 원자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한국 원자력 수출 역사에 굵직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총 20조 원 규모, 4기의 APR-1400형 원자로를 포함한 이 사업은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주계약자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삼성물산, 현대건설 등이 시공사로 참여한 대형 해외 수주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나 건설이 모두 마무리된 지금, 남은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전과 한수원 사이에 터진 1조 4000억 원 규모의 정산 분쟁은 결국 국내를 넘어서 영국 런던의 국제중재법원(LCIA)으로 번졌습니다.

 

픽사베이

 

분쟁의 시작: 예상보다 치솟은 공사비

바라카 원전은 당초 계획보다 사업비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10여 년에 걸친 공사 기간 동안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원자재 가격 상승, 인건비 폭등 등이 겹치면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한수원은 지난해 4호기 상업 운전을 마무리한 이후, 한전에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의 추가 공사비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한전은 현재 약 200조 원의 부채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UAE원자력공사(ENEC)로부터 정산 대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추가 비용 지급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양측이 입장을 좁히지 못한 채, 결국 2025년 5월, 이 분쟁은 ‘런던국제중재법원(LCIA)’이라는 낯선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왜 런던 국제중재법원인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 우리나라 공기업인데, 왜 국내 법원이 아닌 영국에서 중재가 진행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국제계약 시 명시되는 ‘준거법(適用法)’과 중재조항 때문입니다.

한전이 UAE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또 한전이 한수원 등과 서브계약을 맺을 때 모두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명시하고, 분쟁 해결 방식은 중재로, 중재지는 런던으로 정했습니다. 이처럼 제3국의 법이 적용되는 것은 국제계약에서 매우 일반적인 일입니다. 국제사법에 따르면, 당사자 간 명시적 혹은 묵시적 합의로 관련 없는 국가의 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뉴욕협약이라고 불리는 '외국 중재판정의 승인및 집행에 관한 유엔 협약'에 따라 다른 체약국에서 이뤄진 중재 판정의 효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뉴욕 협약 가입국인 172개국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국제사법

제45조(당사자 자치) ① 계약은 당사자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선택한 법에 따른다. 다만, 묵시적인 선택은 계약내용이나 그 밖의 모든 사정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한다.

 

영국법이 국제계약에서 선호되는 이유

영국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무역, 금융, 해상보험, 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판례와 계약 관행을 축적해 왔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영국법을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법체계로 보고, 계약의 준거법으로 선택합니다.

또한,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된 국제중재 허브 중 하나로, 빠르고 유연한 절차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소송 대신 ‘중재’를 선택한 이유

한전과 한수원이 선택한 중재(Arbitration)는 일반적인 소송보다 효율성과 비공개성이 뛰어납니다.

  • 단심제로, 빠른 판결이 가능
  • 비공개 진행으로 영업비밀 보호
  • 중재인의 전문성이 높음
  • 국제적 판정 효력이 널리 인정됨 (뉴욕협약)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중재는 한 번 시작되면 절차가 길어질 수 있고, 중재 비용도 상당합니다. 특히 이번 분쟁처럼 금액이 크고 법률적 쟁점이 복잡한 경우, 수 년 이상 장기화될 우려도 있습니다.

 

결국 한국 기업 간 싸움에 드는 '국가적 손해'

문제는 이 싸움이 공기업 간 분쟁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누가 이기든 지든 손해는 국민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전과 한수원이 서로를 상대로 중재 비용을 들이며 다툰다는 것은, 공공 자원의 낭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는 국제 계약 관리의 중요성, 리스크 평가 체계, 내부 정산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 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바라카 원전은 한국 원전 기술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대규모 정산 분쟁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향후 국제 사업을 추진하는 우리 기업들이 이번 사건을 교훈 삼아 계약 단계부터 리스크를 보다 정밀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국제 무대에 나설수록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계약과 투명한 비용 관리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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