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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쟁이의 산책

사평역에서 _ 곽재구

by 돌담쟁이 2020. 9. 16.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속에서

샤륵샤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사평역에서-

 

 

 

 

 

덕유산 향적봉 가는길의 눈꽃
덕유산의 상고대

 

 

 

곽재구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을때면 겨울산의 눈꽃이 생각나고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옛역의 낡은 난로에서 끓고있는 따뜻한 엽차가 생각난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낮은 온도가 가을이 오자마자 겨울을 떠올릴만큼 지리산의 날씨는 싸늘하고 차갑다.

 

올해는 지리산의 눈꽃을 꼭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