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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쟁이의 산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_ 못다한 이야기1

by 돌담쟁이 2020. 6. 7.

 

역사에 대한거라면 세계사든 우리나라 역사든 좋아한다.

요 근래 4~5년전부터는 우리나라 역사들에 빠져있는데 범위라던가 특정적인 어떤 것들은 없다.

그러다보니 여러부분을 연계해서 읽고하는데 요즘은 인물들에 빠져있다.

조선시대중기 임진왜란을 전후한 인물들에대해 읽다보니 참 속이 터질 이야기들도 많고 화가나도록 특정 인물들이 미울때가 있기도 하다. 이왕 조선 중기 인물들을 지적했으니 광해군으로부터  인조,효종...그리고 정조대왕까지의 인물들에 대해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적어보겠다.

그러다보면 왕들의 여러 면모들도 알게될것이고 그들과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까지 다방면에서 알게되리라.

오늘은 '이덕일'님이 출간한 많은 책들중 몇권을 옮겨보려한다.

물론 적다보면 여러부분의 책에서 아울러 가져와야 이야기가 전개되는것도 있으니 그때그때 참고문헌으로 올리겠다.

 

우선 이덕일님을 표현한 여러말중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역사학자"'이 시대 최고의 문제적 작가"라는 표현들이 있는데  맘에 꼭 든다. 그의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서문에서 볼수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역사 전공자이자 저술가로도 표현되는 그는 식민사학 극복과 역사 대중화의 길을 개척해왔으며 한국사의 원형을 근원에서 재정립하고 있는 역사가이다.라고도 말한다.

 


"송시열과 그들의나라"는 다른 책을 읽던 중에 바로 구입한 책이다.

몇년전부터 연구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호'에 대한 부분에서 호기심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호'로서 보게되는 여러인물들 얘기를 풀어가자니 범위가 넓어졌다.

우선 송시열에 대한 우리나라의 현재 사회의 관점은 거의  신적인존재나 다름없다.

본인 스스로도 공자와 맹자,주자에 버금가는 '송자'로서 불렀던 존재다.

특히 '주자학'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주자를  판단할수없게 한 이가 '송시열'이다.

그러나 그런 송시열에 대한 어떤 이야기, 즉 비난이던지,그럼으로서 얻게되는 화살을 감당할수없게 하는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것같은 시대를 그때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그렇다는것이다.

 

 

17세기 말에 세상을 떠난 인물의 이야기가 21세기 사람들을 다치게 할수있을까?

처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적고자 이덕일님이 시도하려했을때 여러 지인들이 그를 말렸다는 것이다.

'다칠수 있다'는 것이었다.그건 17세기 사회구조가 우리 사회 일각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하다

(p4)

 

 

조선시대는 유교사회다.

유교는 원래 제자백가 중의 한 학파의 사상에 불과했지 종교가 아니었다.

유학이 유교로 변질되면서 여러 비극이 발생했는데 송시열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사실 이런 이야기다.(p5)

공자의 사상을 중세 중국인의 관점에서 해석한 주희(1130~1200,주자)의 사상, 즉 주자학이 도그마가 된것이다.

주희 역시 살아생전에는 뜻을 펼치지 못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였지만 조선에서 송시열을 필두로 한 주자학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었다.송시열이 주희를 신격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제자들에 의해 신격화되었다.(p5)

이런 송시열이 만든 주자학 유일의 사상체제는 조선후기 사회를 시대에 동떨어진 신정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여러 #도그마 는 여전히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그마'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독단적'이라는 말로도 번역되기도한다.


 

이 부분에서 송시열이 아닌 송시열이 태어난 시기인 광해군과 선조시대에 걸쳐 잠시 이야기를 해보고자한다.

송시열은 1607년 선조 40년에 출생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지 9년후였으며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조선의 대학자 '백호 윤휴'가 태어나기 10년전이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정세가 어지러웠고 이시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먹고사는게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인들이 집권하던 시기였기도 하다.

 

 

광해군 시기엔 북인들과 남인들이 등용되었던 시기였는데 이런 모든 사상적인 분류가 왜 조선을 뒤흔들고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던 이율곡과 이황,조식같은 대학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을까?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공자와 맹자,그리고 주자학으로 이어지던 중국의 학문이론들을 우린 왜 척결하지못하였을까?하는 자못 한심하고도 한탈할 일들에 안타깝기까지 하다. 서인 즉,기호학파의 종조였던 율곡 이이, 그리고 동인이었지만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며 남인의 종조가 된 퇴계이황과 북인의 종조가 된 남명 조식등 우수하고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들이 바란건 조선의 개혁과 백성들에대한 애민정신, 그리고 조선 실정에 맟춘 변화였다.

그러나 서인,즉 그중에서도 노론과 소론중 노론들은 정통 학문을 고수한다면서 진보적이지 못하고 퇴폐적이었으며 변화를 바라지않고 말그대로의 주자학 그것도 예학을 고수했던 답답했던 노론의 실세 송시열을 '송자'로 만들며 조선을 고립시켜버렸다.조선에도 수많은 변화의 바람은 불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을 무시하고 묵살했던 인조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빌미를 주어버린 인조반정과 서인 정권,깨져버린 효종의 북벌론, 인질로 끌려갔으나 누구보다 그 변화를 잘 감지하고 돌아와 조선을 변화 시킬수있다 믿었지만 갑자기 죽임을 당한 소현제자등등..순간의 어리석음이 어쩌면 우리를 일제강점기를 살게 했는지 모른다.

벌써 몇백년전부터 이어온 어리석은 정치노선들로 인해 감지를 못하고 흥선대원군같은 쇄국정치를 고집하다가 일본에 임금을 그대로 넘긴것도 모자라 나라를 팔아먹는일까지도 서슴치 않은 매국노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조임금을 보면 무엇보다 한심하고 꽉 막힌 '조선의 어리석은 임금'을 볼수있다.

광해군 15년 서인들에의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무너뜨리기위해 서인의 김자점,최명길,김류,이귀,이괄,심기원들이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인데 조선이 개국한 이래 두번째 쿠데타였다.

인조반정에 대해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인 사건"이라고 얘기한다.

광해군은 재위15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이었다. 우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격변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조선을 전란에서 비켜가게 한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광해군은 한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의 후금(훗날의 청나라)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또한 안으로는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함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임란때 파괴된 농지를 복구하기위한 양전사업을 전개했다.그러나 서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끌어내리려했다.

이들은  명과 청사이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한 광해군의 양면외교정책이 임진왜란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것은 불효라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p45)

 

 

쿠데타 성공이후 이들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란뜻의 '향명대의" 또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리라뜻의 '숭명의리'를 드높혔다. 인목대비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교서의 일부를 보면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것이 200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료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재조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수없어 선왕(선조)께서는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으셨다.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p46)

 

 

그렇게해서 인조를 임금으로 등용시키니 결국 인조는 자식에게 어떻게했는가?

병조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는 1636년12월 끝내 삼전도로 가서  청나라 태종애개 항복을 한다.그리고 볼모로 '소현세자'가 가게된다.동생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과함께 ..

'봉림대군'은 훗날 효종이된다.

'효종의 북벌론'은 이시기 청나라에서의 모든 경험으로 앞을 내다볼수 있었던 그의 선견지명으로 주장한것이라 보는데

'소현세자'는 정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인조로인해 처인 강빈과 아들들마저 귀향 보내져 모두 죽고만다.

인조의 쓸데없는 의심과 아들의 청에 대한 세상읽기에서 온 변화의 의지를 인조는 잘못 읽고있었다.

조금만 더 넓은 해안을 보는 임금이었다면 우리는 참 많은 변화를 그리고 서양의 거센 소용돌이를 우리식으로 바꾸어 일본보다 앞선 나라가 될수 있지 않았을까?싶다.

발버둥을 쳐봐도 양반이 될수없는 서출의 자식과 상민들과 농민들.그리고 노비들.

가만히 앉아서도 밥을 얻어먹던 선비들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으려했고 결코 포기할수없는 것들을 결국 놓지 않고 있다가 조선을 이리저리 치이게 만든것도 모자라 일제강점기에 살게해서 후손들을 치욕스럽게 하였는지 모른다.

 

 

 

 

 

 

 

 

각설하고,,,

 

송시열은 국보 제 239호로 지정된 초상화속의 노인이다.송시열은 오래 살았다. 사약을 마시고 죽을시기가 83세였다.

아마 그렇지 않으면 더 장수했을것이다.

죄목은 "죄인들의 수괴" 라는것인데 조선에서 숙종때를 제외하고 역모가 아닌데도 대신을 사형시킨 예는 없었다 .

심지어 역모가 아닌 한 대신은 국문도 하지 않을정도로 대신을 우대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p19)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당쟁가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3000번이상 언급된 이름이니만큼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는 살아생전은 물론 죽은후에도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송시열의 모든곳이 땅속에 묻히기는 커녕 그는 죽은후 다시 살아나 유학자로는 최대의 영예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었다. 그의 고향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가 설립되었다.(p20)

그는 또 의리의 대명사로 임헌회는 <오현수언>에서 다섯 사람의 조선학자를 그 특성에 따라 분류했는데

'덕치의 조광조' '도학의 이황' '학문의 이이' '예학의 김장생' '의리의 송시열'로 분류한것이다.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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