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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쟁이의 산책

현충일 _국립대전 현충원에 묻히고자 하는 백선엽

by 돌담쟁이 2020. 6. 6.

 

현충일인 오늘 뉴스 전면을 읽다가 국립 대전 현충원의 친일파에 대한 뉴스를 접했다.

그 뉴스를 읽다가 친일파인 백선엽을 절대 현충원에 안치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해 알아보았다.

 

 

 

 


백선엽에 대해 구글에서 찾아보면

 만주국의 간도 특설대 장교이며 대한민국 육군 장교,정치인,외교관,기업인,교육인,사회운동가로 되어있다.

그의 나머지 행적도 다른 sns와 다름없지만 적어보면,

 

1920년 11월 23일 일제 강점기 조선국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아버지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7세(1926년)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홀어머니 아래에서 동생들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백선엽이 여덟살 되던 해(1927년 1월) 연초에 결국 생활고로 인하여 온가족과 함께 대동강에 뛰어 자살하려고 했으나, 백선엽 그의 누이가 설득하므로 인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갔다.

유년 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으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였다. 그는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다니며 책을 읽고 신문 사설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인하여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안남도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한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근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김찬규(金爛奎), 송석하(宋錫夏), 김석범(金錫範),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간도특설대는 대(對)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타격, 공작, 정보, 심리, 매복, 추격, 섬멸작전을 주로 행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전쟁시 빨치산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대(對)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후방 2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는다.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후 조만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체제 성립을 피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 청년단체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됐다. 국군에 입대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백선엽은 스스로 자신이 죽으면 대전현충원에 안장해달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현충원은 독립유공자가 묻혀야 할 곳인데, 친일행적을 벌인 백선엽이 묻히면 안된다는 주장이 크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1939 - 1943)과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1944 - 1945)과의 전투를 수행했으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 백선엽은 그가 썼던 대부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아예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만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는 있으나,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에 대해 "그러나 한 가지 역사상의 비극적인 그것(역사적으로 불가피했었던 간도특설대 대원)만큼은 너무도 유감스럽다."는 간소한 사과만 했을지언정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서 진지한 사죄를 한 적은 아직도 없다는 비판이 있다.


 

 

두 형제가 만든 선인재단에 대해

선인재단에서 부패를 저지른 자들을 척결하지 못한 점 또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선엽은 32살에 장군으로 전쟁을 치른 뒤 예편해 인천에서 중학교와 상업고교를 인수해 백선엽·백인엽 두 장군 형제의 이름 한자씩을 딴 <선인학원>을 설립한다. <선인학원>에서는 학교 부근 주민재산 침해, 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교사해고, 교사들의 예비군복착용, 학생체벌, 부정입학, 부정 편입학, 졸업장 판매, 기부금 입학 등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292의 다부동전적기념관 근처에 한국 전쟁 중인1951년 4월 1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전투에서 북한인민군 3사단을 격멸한 전승기념으로 '백선엽 호국구민비'가 설립되었다.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원수 진급 대상자가 되었으며 실제로도 원수 진급심사를 실시했으나 평가와 비판 항목에 나와있는 내용으로 인하여 원수 진급이 좌절되었다.

 

 

 

 

그외 백선엽은 일본 제1등 서 보장

2000년도에는 자유수호상을 수상했다고 하며 2005년에는 캐나다무공훈장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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